바쁜데 왜 남는 게 없을까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진짜 정신없었는데, 뭘 했더라?" 분명 하루 종일 손을 놀린 적이 없습니다. 메일에 답하고, 회의 두세 개를 돌고, 알림이 뜰 때마다 바로바로 처리했어요. 그런데 막상 머릿속에 "이건 끝냈다" 하고 남는 게 없습니다. 바쁨은 가득했는데 성과는 비어 있는 이 기분, 한 번쯤 느껴보셨을 거예요.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바쁘면 일을 잘하고 있다고 믿거든요. 그런데 바쁨과 성과는 사실 다른 축에 있습니다. 바쁨은 '움직임'이고, 성과는 '결과'예요. 하루 종일 페달을 밟았어도 자전거 받침대를 안 풀었다면 한 발짝도 못 나간 것과 같습니다. 움직였다는 사실이 곧 앞으로 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흥미로운 건, 우리 몸은 이 둘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메일 서른 통에 답할 때나, 한 분기를 좌우할 중요한 제안서를 마무리할 때나, 머리는 비슷하게 '뭔가 하고 있다'는 긴장과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바쁨은 늘 성과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는 한 발도 못 나갔는데도요.
우리는 왜 자꾸 바쁨에 끌릴까

첫 번째 이유는 단순합니다. 쉬운 일이 손에 먼저 잡혀요. 받은 편지함을 비우는 일은 시작도 끝도 분명합니다. 처리할 때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이니 기분도 좋고요. 반면 정말 중요한 일은 대개 막막합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고, 끝이 언제일지도 안 보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쉬운 일부터 손이 갑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옛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위원회가 회의를 하는데, 어마어마한 거액이 드는 발전소 안건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서 다들 잘 모르니 거의 따져보지도 않고 금세 통과시킵니다. 그런데 직원용 자전거 보관소를 짓는 작은 안건에서는 한참을 씁니다. 보관소는 누구나 머릿속에 그릴 수 있으니 "지붕은 무슨 색이 좋다", "위치는 저쪽이 낫다" 하며 한마디씩 보태거든요. 더 사소한 간식비 안건에서는 가장 오래 다툽니다. 간식은 모두가 잘 아니까요.
웃기지만 우리 하루도 똑같습니다. 정말 큰 일은 어려워서 슬쩍 미뤄두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에너지를 쏟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잘게 부서진 잡일로 채워지고, 정작 무게가 나가는 한 가지는 손도 못 댄 채 저녁이 됩니다.
시간이 있으면 일이 늘어난다
두 번째 이유는 시간 자체에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관찰이 하나 있어요. "일은 거기에 주어진 시간만큼 늘어난다"는 말입니다. 엽서 한 장 쓰는 일도, 바쁜 사람은 3분이면 끝내지만, 하루가 통째로 비어 있는 사람은 카드를 고르고 안경을 찾고 우산을 챙길지 고민하다 하루를 다 씁니다. 같은 일인데 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부풀어 오릅니다.
마감이 느슨하면 같은 일이 며칠씩 늘어집니다. 금요일까지 하면 되는 보고서는 신기하게도 꼭 금요일 저녁에 끝나요. 시간이 많다고 일을 더 잘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채울 만큼 일이 부풀 뿐입니다. 그래서 늘 바쁩니다. 늘 시간이 모자랍니다. 일이 시간을 따라 늘어나니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마감을 좁혀버립니다. "이 일은 오늘 오전까지만"이라고 스스로 못을 박아 두면, 신기하게도 그 안에 끝납니다. 시간을 줄였더니 일이 줄어든 거예요. 늘리면 늘어나고, 줄이면 줄어드는 게 일의 성질입니다.
분주함은 가끔 도망의 다른 이름이다
가장 불편한 세 번째 이유를 말해볼게요. 분주함은 종종 회피의 정교한 형태입니다. 정말 중요하고 어려운 한 가지를 마주하기 싫어서, 쉽고 눈에 보이는 잡일 여러 개로 하루를 채우는 거예요.
해야 할 큰 발표 준비가 있는데 갑자기 책상 정리를 시작합니다. 미뤄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메일함부터 정리합니다. 분명히 뭔가 하고 있으니 죄책감은 덜합니다. "나 이렇게 바쁜데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이 편리한 핑계가 되어주거든요. 바쁨은 그렇게 면죄부가 됩니다. 진짜 중요한 일을 안 한 게 아니라, 너무 바빠서 못 한 것처럼 느끼게 해주니까요.
게다가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물음에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바빠요"라고 답합니다. 바쁨이 어느새 성실함의 증표,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신호가 되어버린 셈이에요. 그러다 보면 바쁨 자체가 목적이 되고, 무엇을 위해 바쁜지는 흐려집니다.
그래서, 무엇을 물어야 할까
바쁨을 줄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쁨과 성과를 구분하자는 거예요. 하루를 마치고 딱 두 가지만 물어보면 됩니다.
하나, "오늘 한 일 중에 한 달 뒤에도 남아 있을 일은 무엇인가요?" 메일 답장은 대개 한 달 뒤 흔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끝낸 그 한 가지는 남습니다. 만약 한 달 뒤에 남을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오늘은 바빴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한 날일지도 모릅니다.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미뤄둔 통화 한 통, 처음 꺼낸 기획의 첫 문장 하나라도, 한 달 뒤의 나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어 줬다면 그건 남는 일입니다.
둘, "오늘 내가 그렇게 바빴던 건, 혹시 무엇을 피하기 위해서였나요?" 답하기 불편하다면, 아마 그 불편한 한 가지가 진짜 해야 할 일일 겁니다. 우리가 가장 정성껏 피하는 일이, 대개 가장 중요한 일이거든요.
내일도 우리는 바쁠 거예요.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하루의 끝에서 이렇게 한 번 물어보면 어떨까요. 오늘 나의 바쁨은, 나를 어디로 데려갔을까요?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그저 방향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방향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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